한국의 대중매체

역사

식민지 시대(1910–1945)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조선총독부는 다른 공공 기관과 함께 언론을 직접 통제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식민 정부는 문화 활동에 대한 노골적인 통제를 완화하고 여러 한국 신문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에 대한 배후 지시를 유지하면서 기능하도록 허용했다.

1920년대에 동아일보 와 같은 한국의 토속 신문과 개벽(창작) 과 같은 지적 저널은 일본 검열관들과 계속되는 교전 벌였다. 식민 당국은 1926년에서 1932년 사이에 수백 차례에 걸쳐 개별 호의 판매를 금지했다. 이후 몇 년 간의 제2차 세계 대전 동원은 한국 언론의 자율성에 대한 유사성을 종식시켰다. 모든 한국어 출판물은 1941년에 금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1945~1990) 이후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온갖 종류의 신문과 정기 간행물이 급증하고 간헐적으로 언론을 검열한 이후 거의 모든 대한민국 정부는 때때로 언론 통제를 시도했다.

이승만 정부는 좌파 신문을 금지한 군사정권의 조례 제88호를 이어갔다. 이승만은 또한 1948년에서 1960년 사이에 온건 신문을 폐간하고 기자발행인을 여러 차례 체포했다. 1961년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서울의 64개 일간지 중 15개를 제외한 모든 일간지를 폐간하고 라디오와 뉴스 대행사(통신사)를 사용하는 동안 국내 뉴스 서비스, 주간지, 월간지의 비교 가능한 비율의 공식 노선을 홍보하기 위해 등록을 거부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을, 1972년 이후에는 정부에 대한 비판을 처벌하는 긴급 조치를 취해 언론의 질서를 유지했다. 1974년 정부는 언론인 몇 명을 해고하라고 지시하고 KCIA를 이용해 동아일보가 광고주들을 위협함으로써 박근혜 정부에 대한 대중의 반대에 대한 보도를 중단하도록 강요했다.

박근혜 정부와 그 이후의 전두환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통해 언론에 대한 상당한 통제와 감시를 행사했다. 1980년 말, 전두환 정부는 한국 전쟁 이후 남한에 존재했던 것보다 더 철저한 언론 통제를 확립했다. 독립 통신사는 하나의 국영 기관으로 흡수되었고, 수많은 지방 신문은 폐간되었으며, 중앙 신문은 지방 도시의 방송국 특파원에게 금지되었고, 기독교 방송 네트워크는 뉴스 보도를 제공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두 개의 독립 방송사는 국영 한국방송공사 (KBS)에 흡수되었다. 또 당시 노태우가 지휘하던 기무사령부와 문화정보부는 한국 언론인 수백 명을 해고하고 신문 작성이나 편집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1980년 12월의 언론기본법은 전두환의 언론 통제 시스템의 법적 정점이었으며 신문, 정기 간행물 및 방송 매체에 대한 검열과 통제를 규정했다. 또한 언론인의 전문 자격을 설정했다. 언론 검열은 신문사 편집자들에게 매일 발송되는 '보도지침'을 활용해 문화정보부 산하 공공정보정책실에서 정보당국, 각종 정부기관 대표, 청와대 비서실과 조율 되었다. 지침은 강조하는 문제, 다루거나 피해야 할 주제, 정부 보도 자료의 사용, 심지어 헤드라인의 크기까지 철저히 다루었다. 집행 방법은 편집자에게 전화를 거는 것부터 경찰에 의한 심문과 구타를 포함한 더 심각한 형태의 위협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한 전직 문화정보부 공무원은 1988년 국회 청문회에서 1980년부터 1982년까지 그의 재임 동안 준수율이 약 70%에 달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인쇄 및 방송 매체 검열은 전두환 정부의 가장 광범위하고 공개적으로 비판받는 관행 중 하나가 되었다. 정부가 통제하는 연합뉴스조차 1989년에 "다른 매체보다 못한 TV 회사들이 1980년대 초 정부에 대한 왜곡된 보도로 인해 신랄한 대중적 비판의 주요 대상이었다"고 언급했다. 편집자들은 언론기본법 및 관련 관행의 폐지를 촉구했고, 같은 목적으로 법안이 국회에 통과되지 못했으며, KBS의 검열에 항의하여 강제 시청료를 원천 징수하는 공개 캠페인이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았다. 1986년 여름이 되자 집권여당도 여론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의 정치적 자유화는 언론 규제를 완화하고 1980년 5월 광주 학살 과 같은 민감한 주제를 더 기꺼이 조사하려는 신세대 언론인들을 가져왔다. 1987년 6월 29일 노무현의 8항 선언은 "신문이 지방도시에 특파원을 배치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신문사에서 보안요원을 철수시키는 것을 포함하는 언론의 자유 "를 제공했다. 한국 언론은 급속한 팽창을 시작했다. 서울신문은 취재 범위를 확대하고 특파원의 지방도시에 주둔하 관행을 재개했다. 전직 청와대 대변인이 임시로 관리하고 있지만 1980년부터 국영 KBS가 관리하던 상업방송인 MBC텔레비전 네트워크가 독립방송을 재개했다. 라디오 방송국의 수는 1985년 74개에서 1988년 말에는 111개( AMFM 방송국 포함), 1989년 말에는 125개로 증가했다. 정부가 출판 산업에 대한 규제를 풀면서 정기간행물의 수가 증가했다.

한국 언론의 질적 변화도 있었다. 라디오 네트워크인 기독교 방송은 1987년에 뉴스와 종교 프로그램을 다시 방송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정부는 남한 출신이 많은 북한 예술가와 음악가의 작품에 대한 오랜 금지 조치를 부분적으로 해제했다. 반체제 언론인들이 운영하는 신문이 1988년부터 발간되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다른 몇 개의 새로운 일간지도 등장했다. 많은 새로운 주간 및 월간 정기 간행물은 정치, 경제 및 국가 안보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소규모의 전문 독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전통적인 일반 발행 부수 잡지의 높은 수익을 우회했다. 관찰자들은 정치-군사 관계, 군대 내 파벌, 정치에서 보안 기관의 역할, 반체제 조직의 활동과 같이 이전에는 금기시되었던 주제에 대한 언론 보도의 극적인 증가에 주목했다. 이러한 문제 및 기타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여론 조사도 점점 더 규칙적으로 증가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울의 몇몇 일간지의 기자들은 1987년 말과 1988년 초에 노동조합을 조직했고 편집의 자율성과 신문 경영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9년 한국의 4대 일간지인 한국일보, 중앙 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총 발행부수는 650만부 이상이었다. 반체제 <한겨레>의 독자는 45만 명으로 주요 일간지나 경한신문, 서울신문 같은 작은 일간지보다는 적지만 전문 경제신문 4곳보다 많다. 정부가 통제하는 한국일보를 제외한 모든 주요 일간지는 민간 소유였다. 몇몇 다른 일간 간행물은 스포츠팬과 청소년 사이에서 전문적인 독자층을 확보했다. 두 개의 영자 신문인 정부 지원을 받는 코리아 헤럴드와 독립적인 소울 면역과 제휴한 코리아 타임즈는 외국 대사관과 기업에서 널리 읽었다. 중국어 일간지는 한국의 소수 중국인 인구를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했다.

연합뉴스는 정부기관과 신문사, 방송사에 국내외 뉴스를 제공했다. 연합뉴스는 또한 Asia-Pacific News Network를 통해 컴퓨터 전송을 통해 영어로 한국의 발전 정보를 제공했다. 4개의 위성 링크 스테이션을 통해 세계 미디어와의 추가 연결이 용이해졌다. 1988년 6월에 설립된 국제방송센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위해 10,000여 명의 방송사를 지원했다. 정부의 KBS 라디오 네트워크는 12개 언어로 해외 방송을 한다. 두 개의 사설 라디오 네트워크인시아 아시아방송사(Asia Broadcasting Company) 와 극동 방송사(Far East Broadcasting Company)라는 소련 극동, 중국, 일본을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 시청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했다.

남한 정부도 북한 문제를 전담하는 내외신문사를 지원했다. 원래 통일 정책 문제에 대한 정부 노선을 따르는 선전 수단이었던 내외 언론은 1980년대 중반 북한의 정치, 사회 및 경제 상황을 해석하는 데 점점 더 객관적이고 온건한 어조로 바뀌었다. 내외 출판사의 영문 간행물인 Vantage Point는 북한의 사회, 경제, 정치 발전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제공했다.

정부가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2개의 신문(한글과 영어)과 국영 텔레비전을 제외하고, 언론의 소유권은 대부분 정치적 또는 경제적 권력과 구별된다. 한 가지 예외는 보수 일간지인 중앙 일보였다. 소유주인 고(故) 삼성그룹 창업자이자 억만 장자 이병철의 면밀한 감독 아래, 신문과 그 산하 TBC 텔레비전 네트워크는 일반적으로 1970년대에 박정희 정부를 지원했다. 그러나 정부와의 관계는 1980년 전두환이 TBC와 KBS의 합병을 강요하면서 경색되었다. 1989년 중앙일보의 언론인 파업은 한국의 주요 신문사에서 일어난 유사한 사건 중 하나로서 훨씬 더 큰 경영권과 편집권을 획득했다.

한국의 대부분의 주요 신문은 광고 및 주요 출판사와의 제휴를 통해 재정 지원을 받았다. 예를 들어 동아출판사는 권위 있는 일간지인 동아일보 뿐만 아니라 어린이 신문, 일반 월간 신동아, 여성 잡지, 그리고 학생들을 위한 전문 참고서와 잡지 등 다양한 정기간행물을 발간했다. 전후 기간 내내 동아일보는 반대파에 대한 동정으로 주목받았다.

한국의 주요 반체제 신문인 <한겨레> 1988년 5월부터 발행되기 시작했다. 이는 1970년대 초나 1980년에 정부에 의해 숙청된 반체제 언론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 신문의 많은 기자와 편집진은 새로운 벤처에 합류하기 위해 주류 신문의 직위를 떠났다. 이 신문의 구조와 접근 방식은 과거 한국 언론이 정부에 의해 너무 쉽게 흡수되었다는 창립자들의 견해를 반영했다. 이 신문에는 정부의 언론 정책을 주시하고 다른 신문의 이데올로기 및 정치적 편향을 비판하기 위해 인권 부서와 매스 미디어 부서가 있다. 이 신문의 민족주의와 조국통일에 대한 관심은 북한의 백두산 정상에 있는 천지호를 로고로 상징적으로, 한글 전용으로 하여 표현하였다. 그리고 18세기 분단 전 한국의 유명한 간행물에서 유래한 종이의 이름이 인쇄된 활자체로 되어 있다. 종이는 여타 서울일보처럼 세로가 아닌 가로로 인쇄됐다. 다른 혁신에서 한겨레는 "정치권력과 거대 자본으로부터 진정으로 독립된 세계 최초의 신문"이라는 주장에 따라 대기업의 광고가 아닌 판매 수익, 민간 기부 및 주식 매각에 의존했다. " 이 신문은 1989년 정부의 압력이 가중되었다.

한국은 또한 광범위하고 잘 발달된 시각 매체를 가지고 있었다. 1919년 최초의 한국 영화가 제작되었고 이후 대도시에 영화관이 세워졌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확산은 균질화된 대중문화의 확산과 농촌의 도시적 가치에 영향을 미쳤다.

현재 상태(1990년~현재)

수십 년간의 국가 통제와 엄격한 검열 이후, 한국 언론(인쇄물, 텔레비전, 온라인)은 상대적인 자유의 시기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1987년 억압적인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고 1990년 이후 텔레비전 시장이 크게 확대되었다. 1980년에는 전국 신문이 28개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122개이다. 2002년 위성 방송은 한국 전역의 가정에 다채널 상업 텔레비전을 보급했다. 대부분의 외부 관측통에 따르면 한국에서 정치적 담론은 제한이 없다. 그러나 지속적인 우려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국가보안법은 정부가 친북 또는 공산주의로 간주되는 사상의 표현을 제한하도록 허용한다. 이 법령에 대한 광범위한 해석은 평화로운 반대 의견에 찬물을 끼얹는다. 또 2003년에 노무현 대통령은 주요 4대 일간지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정부는 사설에 허위사실이 적발되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외부 관측통들은 보도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한국 정부와 경제계가 사용하는 압력 전술을 비판했다.

주요 신문으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이 있으며 모두 서울에서 발행된다. 전국 5대 텔레비전 방송사는 KBS-1KBS-2 (공영방송), MBC (공공기관 운영), EBS (국영방송), SBS (상업방송)이다. 한국 가정의 약 70%가 광대역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으며 온라인 미디어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인기 뉴스 웹 사이트(예: OhMyNews.com)는 하루에 1,500만 건의 방문을 기록한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뉴스는 전자적 수단을 통해 전달되며, 한국은 디지털 혁명의 선두에 있으며 초고속 무선 인터넷 서비스의 선구자다.

인쇄 매체

백군화상 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 ( 직지, Anthology, Anthology of Zen Buddhist Teachers)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 이 책은 1452-1455년에 인쇄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보다 78년 앞선 1377년(고려 왕조)에 출판되었다. 1446년 '조선'의 4대 왕이자 '집현전'의 학자인 세종에 의해 '훈민정음'이 출판되었다. 이 글은 현대 고유 한글의 기초가 되는 '한글'의 반포에 대해 설명한다. 그것은 '훈민정음 예의본(본체)'과 '훈민정음 해레본(해설)'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서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목적을 밝혔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신문

조선 후기에 발행된 한성순보는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이었다. 공식 인쇄소인 박문국에서 발행되었으며, 한자로 쓰여졌으며 열흘에 한 번씩 출판되었다. 그 신문은 국내외 뉴스를 모두 실었고, 계몽적인 의견들을 담고 있었다.

독립신문운 국내 최초의 한글 신문이자 최초의 민영 신문이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한글과 영문 두 가지 버전으로 출판했다. 독립신문은 사람들을 계몽하고 어리석은 조선 관리들을 비난하기 위해 노력했다.

1980년대 이후, 언론기본법이 폐지되면서 신문은 더 큰 자유를 얻었다.

오늘날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는 주요 보수신문이고, 한국일보는 온건, 경향신문한겨레는 주요 진보신문이다. 한국에서는 보수적인 신문이 더 널리 읽힌다. 매일 경제 신문한국 경제 신문이 주요 경제 신문이다.

한국에서도 다른 많은 나라와 마찬가지로 신문 구독자 수가 감소하고 있다.

전자 매체

라디오

최초의 라디오 방송은 1927년 '경성방송'의 JODK였다. 몇몇 사람들은 1947년 '한국방송'의 HLKA를 한국 최초의 라디오 방송으로 여긴다. 2003년부터 ㅇDAB(Digital Audio Broadcasting) 또는 DAR(Digital Audio Radio) 서비스가 이용되고 있다.

  • 채널

기본 라디오 방송국으로는 KBS, MBC, SBS, EBS가 있다.

한국에서는 장수 프로그램이 여러 개 있기 때문에 MBC 라디오가 일반적으로 가장 인기가 많다. MBC는 FM4U표준FM의 2개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조영남&최유라의 라디오 전성시대'는 재미있는 이야기와 K-pop 음악을 제공하는 가장 유명한 프로그램이다.

  • SBS

SBS는 라디오에서도 파워 FM러브 AM과 같은 두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 EBS(교육방송)
  • CBS: 한국 최초의 상업 라디오 방송사이다. 그것은 기독교에 관한 프로그램을 포함하고 있다.
  • 기타 종교 프로그램 방송사: PBC(Pyeonghwa Broadcasting Corporation, 평화방송), BBS(Buddhism Broadcasting System(불교방송), 佛敎放送), FEBC(Far East Broadcasting Co., Korea, 極東放送, 극동방송), *WBS(원음방송)
  • 교통 방송사: TBS (교통 방송 시스템). 그들은 교통을 전문으로 한다. 다른 많은 스테이션도 일반적으로 57분마다 3분씩 시간별 교통 상황 보고서를 제공한다.

한국에는 많은 라디오 방송국이 있지만, 채널이 독특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KBS 1FM, KBS 1AM, TBS(교통방송)는 다소 특색이 있다. 다른 채널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 따라 방송된다.

텔레비전

KORCAD는 1956년에 시작된 대한민국 최초의 TV 방송국이었다. 한국에서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은 흔하고 인기가 있다. 지상파 방송사에는 4개의 텔레비전 방송국과 5개의 채널이 있다.

KBS, MBC, EBS는 공영방송이고 SBS는 민영방송인 '다공영방송' 체제다. 다른 나라들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공영 방송국과 많은 상업 방송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특한 시스템이다.

KBS는 TV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전 가정에서 모은 TV 수신료에서 발생하는 공적 자금으로 운영된다. 2010년 현재 수수료는 ₩2,500(약 $2 USD)이다. 낮은 공적자금 때문에, KBS2는 광고를 운영한다. MBC의 소유권을 살펴보면 국책 비영리단체( 방송문화진흥재단 )가 70%, '정수장학재단'이 30%를 소유하고 있다. 또한, KBS2와 MBC는 광고를 진행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공영방송의 정의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최근에 디지털 텔레비전 기술이 등장했다. 비록 일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디지털 신호 방송을 시작했지만, 미국처럼 아직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12월 31일을 대한민국의 디지털 전환 기한으로 정했다. 2013년부터, 한국은 아날로그 방송에서 디지털 방송으로 전환한다. (이는 영국의 전환 날짜와 일치하다. ) DTV Korea에 따르면 디지털 TV의 보급률은 약 60%(2010년 기준)이다.

뉴미디어

인터넷

한국은 2003년 인터넷 사용률 세계 3위를 차지했다. 한국 정보통신부의 통계에 따르면, 가구의 78.5%가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중 93.6%가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2005년).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뉴스, 소셜 미디어, 쇼핑, 은행 업무, 게임, 교육 콘텐츠와 같은 서비스를 위해 한국에서 인터넷을 활용한다.

인터넷 저널리즘

중앙일보는 1995년 아시아 최초의 인터넷 뉴스 웹사이트를 개발했다. 시작 후, 거의 모든 일간지가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Prussian과 같은 온라인 전용 포털도 있다.

소셜 미디어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SNS가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소셜 미디어는 카카오톡, 네이버, 싸이월드와 스노우이다. 카카오톡은 소셜 미디어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이다. 사이언스 다이렉트에 따르면 "4,910만 명이 넘는 활성 사용자가 있는 한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IM 애플리케이션"이다(2019, Digital Investigation). 소셜 미디어 애플리케이션으로서의 광범위한 범위는 현재 4,910만 명의 활성 사용자를 보유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주요 초점이다. 사용자들은 이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사용자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 친구에게 구매하고 선물을 보낼 수도 있다. 사용자가 멀리서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한다.

네이버는 대한민국의 구글에 해당하는 검색엔진으로 대한민국 대표 검색엔진이다. 검색 엔진 외에도 많은 다른 속성이 있다.

-BAND: 그룹 커뮤니케이션에 중점을 두고 그룹과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는 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이다. 여기에는 투표, 그룹 일정관리 및 비공개 채팅과 같은 기능이 포함된다.

-네이버 카페: 많은 포럼과 마찬가지로 네이버 카페는 사용자들이 자신의 인터넷 커뮤니티를 게시하고 만들 수 있도록 한다.

-LINE: Line은 문자, 이미지, 심지어 음성 채팅까지 포함하는 인스턴트 메시징 앱이다. 이 외에도 회사는 LINE FRIENDS로 알려진 공유할 캐릭터도 만든다. 이러한 캐릭터는 또한 다양한 제품으로 변환된다. 봉제 인형, 핀, 심지어 옷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러한 캐릭터 중 일부는 BT21, Brown and Friends이다.

-싸이월드는 한국 최초의 소셜 네트워크 애플리케이션 중 하나입니다. 싸이월드에서는 다른 회원들과 관심사와 추억을 공유하며 우정을 쌓아 채팅을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셜 네트워킹 세대를 통틀어 경쟁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기가 떨어지고 실패했다. 실패의 또 다른 이유는 싸이월드의 제한 때문이었다. “싸이월드는 국가 간 장벽을 만들었고, 지역 서비스 제공자 이상으로의 확장에 실패했다”(박혜민(2011)). 최근 몇 년 동안 Cyworld는 컴백을 이야기해왔다.

-Snow는 소셜 미디어 애플리케이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애플리케이션과 달리 주요 초점은 셀카를 위주로 한 사진이다. 이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외모를 변경할 수 있다. 여기에는 메이크업 추가, 눈 색깔 변경, 심지어 얼굴 슬림화도 포함된다. 다른 속성은 귀엽고, 소름 끼치며, 재미있는 다양한 필터이다. 이 애플리케이션은 화장대와 친구와 필터 및 이미지를 공유하는 것이 초점이 맞춰져 있다.

블로그

거의 모든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블로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네이트, 네이버, 다음의 블로그가 가장 인기가 많다.

소셜 네트워크

초기 소셜 네트워킹 플랫폼인 싸이월드는 2000년 한국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2014년에 문을 닫았다. 사용자는 자신의 정보, 기분, 사진 등을 업로드할 수 있다. 그것은 페이스북과 유사한 맥락에서 다른 사람들을 "팔로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마이크로 블로그

한국에서 스마트폰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그 보급률이 증가하고 있다. 'me2day'와 'yozm'은 한국 매체의 다른 마이크로블로그이다.

규정

비즈니스 규정

시장 진입 제한

누가 방송사업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규제다. 이 규정은 대게 전자파가 부족하여 방송시스템을 운영하고자 하는 자는 모두 할 수 없고, 사업자는 방송사를 운영하기 위하여 공정하게 설정해야 한다는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예: 재정력, 사회경험 등).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기업(상위 30위 이상), 신문사, 기획사는 언론의 독립성 때문에 방송 시스템을 운영할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에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개정된 미디어법은 이를 허용한다.

  • 지상파 방송,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 위성 방송: 정부가 허가함.
  • 뉴스채널, 종합서비스채널, 홈쇼핑채널: 정부가 승인함.
  • 기타 프로그램: Resister

소유권 제한

이것은 한 사업자가 소유할 수 있는 방송 시스템의 수를 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의 목적은 방송의 독점이나 과점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 한 제공자(개인 또는 법인)는 지상파 방송사 및 위성 방송사에서 하나의 사업만 소유할 수 있다.
  • 케이블 시스템 운영자와 프로그램 제공자는 둘 이상의 방송사와 전송 라인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장 점유율과 공급자 수에 관해서는 정부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
  • 한 제공자는 지상파 방송사와 케이블 방송사의 결합을 제외하고 지상파 방송사, 위성 방송사, 케이블 방송사를 소유할 수 있다.
  • 케이블 방송에서는 한 제공자가 시스템 운영자, 네트워크 운영자 및 프로그램 제공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지만, 시장 점유율 및 제공자 수와 관련하여 제한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방송법과 인터넷멀티미디어방송사업법이 새롭게 제정되면서 흐름이 바뀌고 있다. 신문사와 대기업은 지상파 방송사 지분 10%, 케이블 방송사 지분 30%, IPTV나 뉴스 채널 지분 49%를 보유할 수 있다.

콘텐츠 규제

한국 미디어 내의 콘텐츠는 경우에 따라 상당히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대량의 유혈과 폭력 및 중요한 법률에 유배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검열하는 경향이 있다(보통 어떤 출처에 있는지에 따라 다르다).

더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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