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仁宗, 1515년 3월 20일(음력 2월 25일) ~ 1545년 8월 17일(음력 7월 1일))은 조선의 제12대 국왕(재위 : 1544년 12월 14일(음력 11월 20일) ~ 1545년 8월 17일(음력 7월 1일))이다.
인종 仁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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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 중 효릉의 2020년 모습 (문화재청) | |
제12대 조선 국왕 | |
재위 | 1544년 11월 20일 ~ 1545년 7월 1일 (음력) |
즉위식 | 창경궁 명정전 |
전임 | 중종 |
후임 | 명종 |
조선국 왕세자 | |
재위 | 1520년 4월 22일 ~ 1544년 11월 20일 (음력) |
전임 | 폐세자 황 |
후임 | 순회세자 |
이름 | |
휘 | 이호(李峼) |
묘호 | 인종(仁宗) |
시호 | 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 (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
능호 | 효릉(孝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15년 2월 25일(음력)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
사망일 | 1545년 7월 1일(음력) | (30세)
사망지 | 조선 한성부 경복궁 청연루 |
부친 | 중종 |
모친 | 장경왕후 윤씨 |
배우자 | 인성왕후 박씨 |
자녀 | 없음 |
성은 이(李), 휘는 호(峼), 아명은 억명(億命)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천윤(天胤)이며 묘호는 인종(仁宗), 시호는 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이다.
중종의 적장남이자 넷째아들로 어머니는 파원부원군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이며, 왕비는 금성부원군 박용(朴墉)의 딸인 인성왕후(仁聖王后)이다.
기묘사화 때 숙청된 조광조를 신원하고 현량과를 부활하는 등의 도학정치를 추구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당대의 대신들에게 인본의 바탕을 둔 유교의 이상적 군왕으로 일컬어졌으나 재위 7개월만에 승하하였다.
1515년(중종 10년) 2월 25일, 중종(中宗)의 넷째아들이자 적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억명(億命)'이다. 어머니 장경왕후가 인종을 임신했을 때 꿈을 꾸었는데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억명으로 지으라'고 하자 잠에서 깬 장경왕후가 벽에 '억명'이라는 글자를 써놓아 두었다가 지은 이름이다. 어머니는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인데, 인종을 낳고 1주일 후인 3월 2일 산후병으로 사망하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 친할머니인 정현왕후가 돌보았으며, 외숙부인 윤임을 위시한 대윤(大尹)의 정치적 지지를 받았다.
1520년(중종 15년) 4월 22일,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로 책봉되기 전 3월 5일에 '억(億)'을 '호(岵)'로 개명한다.
1522년(중종 17년) 관례를 치르고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2년 뒤인 1524년(중종 19년), 박용의 딸 박씨(인성왕후)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1527년(중종 22년), 세자의 생일 무렵에 죽은 쥐의 사지를 찢어 불에 지진 다음 동궁전 창가에 매달아놓고 세자인 인종을 저주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사건의 배후로 중종의 서장자이자 인종의 이복형인 복성군과 복성군의 어머니인 경빈 박씨가 지목되어 폐서인 되었으며, 경빈의 딸들이자 인종의 이복 누나들인 혜순옹주와 혜정옹주 또한 폐서인 되었다.
1533년(중종 28년), 동궁(東宮)의 빈청 남쪽 바자(把子) 위에 사람의 머리 모양을 한 물건이 발견되었다. 이 형상에 누군가가 머리카락을 붙이고 이목구비등을 새겨 목패에 단 다음, 목패에 '세자의 몸을 능지할 것', '세자 부주(父主)의 몸을 교살할 것', '중궁(中宮)을 참(斬)할 것' 과 같은 내용을 적어놓았는데, 이 저주 사건으로 인해 6년전 폐출된 복성군 모자와 혜정옹주의 남편인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가 연루되었다.
대간의 탄핵을 받은 복성군과 경빈 박씨는 마침내 사사되었는데, 나중에서야 이 사건의 배후가 인종의 누나인 효혜공주의 남편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와 김희의 아버지인 김안로가 꾸민 일임이 드러났다. 이후 인종은 중종에게 복성군 모자의 신원 회복과 폐출된 두 옹주의 작호를 회복시켜줄 것을 청하였다.
1538년(중종 33년) 10월, 중종은 본인의 재위년수와 나이가 세종의 재위년수와 세종이 승하했을 때의 나이와 비슷해지자 태종과 세종의 고사를 들며 세자에게 선위하려 하였는데, 세자가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극구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1544년(중종 39년) 11월 14일, 중종이 전위의 뜻을 밝히고 다음날 승하하자 1주일 후인 11월 20일 창경궁 명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이후 기묘사화때 숙청된 조광조를 신원해 달라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1545년(인종 1년) 6월 26일, 인종은 고열에 시달리며 혼절하는 등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6월 29일, 대역죄인과 강상죄 등 중대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제외한 잡범들의 죄를 용서한다고 교서를 내렸다. 그날 밤 병세가 악화되어 위독해지자 이복 동생인 경원대군(명종)에게 전위한다는 뜻을 밝혔다.
훙서에 임박하여 붓을 잡고 유서를 쓰려 하였으나 쓰지 못하고 탄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 나의 생각을 문자가 아니면 여러 신하들에게 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제 이와 같으니 슬픔을 어찌할 수가 없다. 부왕이 돌아가신 지 오래지 않아 내가 또 이에 이르러 마침내 효도를 마치지 못하니, 내가 죽거든 반드시 부모의 능 곁에 장사 지내서 내 뜻을 이루게 하라. 병이 이와 같으니 효도를 마치지 못하겠고, 또 경들과 더불어 다시 서로 보지 못하겠다. | ” |
— 〈인종대왕 묘지문〉 |
1545년(인종 1년) 7월 1일, 경복궁 청연루 소침에서 승하하였다.
묘호는 인종(仁宗)이며, '인(仁)'은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함'을 말한다. 시호는 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이다.
처음엔 시호를 예문철무장숙흠효(睿文哲武章肅欽孝)라고 했다가 '예' 자를 '헌' 자로 고치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홍언필이 태조의 시호 강헌(康獻)과 겹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하지만 중의도 찬성하여 고치기로 했으며 허자가 체화거중(體和居中)의 뜻이 선왕과 합치한다 하여 '철' 자를 '의' 자로 고쳤다.
능은 효릉(孝陵)이며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다. 서삼릉을 구성하는 왕릉 가운데 하나이다. 왕비 인성왕후와 나란히 묻혀 쌍릉을 이루고 있으며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일반에 비공개되어있다.
윤임과 윤원형은 정희왕후의 아버지 윤번의 후손들로, 각각 인종과 명종의 외숙부들인데, 이들은 중종 말엽부터 세력을 형성하였다. 인종의 외가인 윤여필, 윤임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대윤(大尹)과, 경원대군(명종)을 지지하는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인 소윤(小尹)이 파를 나누어 갈등하였다.
인종이 즉위한지 1년도 못되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고 윤원형 등이 권력을 잡았는데, 인종의 외숙부이자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 및 대윤 일당을 역모로 몰아 사사하였다. 윤여필의 외손자인 종친 계림군을 비롯하여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봉성군 등 왕실 종친 및 윤임과 당여를 이루거나 왕권에 위협적으로 여겨졌던 자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되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우애와 효심이 깊어 유교의 이상적 군주로 일컬어졌다. 당대의 기록을 비롯해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세종, 문종, 성종, 정조와 더불어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왕의 학문을 예찬하고 인품과 성품을 칭송한 기록이 남아있는 몇 안되는 군주 중 하나이다.
부모
왕비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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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가 생각하건대, 형제간이란 것은 같은 기(氣)를 나누어 받아서 태어나기에 숨쉬는 것도 서로 통하여 우애로운 정을 자연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다 비상(非常)한 변(變)이 있었더라도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지난번 미(복성군)의 일을, 신은 어려서 그 일의 전말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요망한 일을 비록 박씨(朴氏, 경빈 박씨)가 했다고는 하지만 미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먼 지방으로 귀양보낸 것도 지나친 일인데, 그 뒤에 또 다시 큰 옥사가 일어나 모자가 연이어 죽고, 형제간이 된 사람의 정리로서 어떠하겠습니까. 죽은 자는 이미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미(복성군)의 딸 하나가 민간에 버려져 서인과 다름 없이 되었으니, 두 옹주(혜순옹주 · 혜정옹주)도 나이 어린 딸로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신(臣) 하나로 인하여 형제간의 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신이 항상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 ” |
“ | 왕은 이른다. 하늘이 이미 재앙을 내려 선왕께서 승하하신 지 1주년이 못되었는데, 신(神)이 또한 돕지 아니하여 내 몸에 병이 나서 이미 수순(數旬)이 지났다.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스스로 매우 꾸짖을 뿐이다. 그러나 병이 오래 위중함이 이토록 극도에 이르니 | ” |
전교하였다.
- "제물(祭物) 중에 쓰지 않게 되어서 새끼 노루가 아직 살아 있다 하니,
- 【사신이 사제하려고 은(銀)으로 개성부(開城府)에서 사 왔으나
- 마침 쓰지 않았으므로 오래도록 살 수 있었다.】
- 이것은 산으로 돌려보내어 다시 살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빨리 놓아 주라."
사신은 논한다.
- 이 마음이 임금이 되기에 넉넉하거니와,
- 이 마음을 능히 확충한다면 사해(四海)를 보전하는 데에 있어서도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 이렇게 생물(生物)을 사랑하니, 백성을 인애(仁愛)하는 것을 알 만하다.
— 《인종실록》 2권,
인종 1년(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5월 2일 (계해)
- 상(인종)은 자질이 매우 아름다우며 침착하고 온후(溫厚)하며
- 학문은 순정(純正)하고 효우(孝友)는 타고난 것이었다.
- 동궁에 있을 때부터 늘 종일 바로 앉아 언동은 때에 맞게 하였으니
- 사람들이 그 한계를 헤아릴 수 없었다.
- 즉위한 뒤로는 정사할 즈음에 처결하고 보답하는 데에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고,
- 때때로 어필(御筆)로 소차(疏箚)에 비답하되 말과 뜻이 다 극진하므로
- 보는 사람이 누구나 탄복하였다.
- 외척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지 않고 시어(侍御)에게 가까이하지 않으므로 궁위가 엄숙하였다.
- 중종(中宗)이 편찮을 때에는 관대를 벗지 않고 밤낮으로 곁에서 모셨으며
- 친히 약을 달이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으며 어선(御膳)을 전혀 드시지 않았다.
(중략)
- (인종의) 병이 위독하던 밤에는 도성 사람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자지 않고
- 궐문에서 오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상의 증세가 어떠한가 물었으며,
- 승하하던 날에는 길에서 누구나 다 곡하여 울며 슬펴하는 것이
- 마치 제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았다.
— 《인종실록》 2권,
인종 1년(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7월 1일 (신유)
- 승하하시던 날에 도하의 유생이 각각 소식을 듣고 선후하여 궐하(闕下)에 달려와서
- 통곡하는 것이 밤이 되어도 끊이지 않고,
- 미천한 지아비와 지어미까지도 거리를 메우고 길을 메워 누구나 다 가슴을 치고 슬퍼하였다.
- 대행왕이 훙서에 임박하여 기절하였다가 되살아난 것이 두어 번인데,
- 민간에게 듣고는 궐하에서 골목까지 어른 아이 없이 모두 손을 모아 하늘에 빌었다.
- 이날에 이르러 유생이 또 궐외에서 곡하여 다들 그 슬픔을 다하였다.
- 아, 허다한 유생이 어찌 죄다 군자다운 사람이었겠으며,
- 미천한 지아비와 지어미도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 즉위한 지 한 해가 못되었는데 인심이 이러하니,
- 덕이 사람을 감동시키기 쉽고 사람에게 깊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인종실록》 2권,
인종 1년(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7월 6일 (병인)
제12대 조선 국왕 | ||
전 임 중종 | 1544년 ~ 1545년 | 후 임 명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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