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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내전은 로마 공화국 말기 카이사르의 민중파와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원로원파 사이에 벌어진 내전을 말한다. 이 내전에서 카이사르는 원로원 공화정파를 제압하고 권력을 잡았고 로마 공화정은 그 종말로 한걸음 다가가게 되었다. 기원전 53년을 고비로 제1차 삼두정치가... |
의원들이 공화정을 복고하고자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으며,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영속적인 전제정을 성립하였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신으로 축성하였다.... |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자살해 전쟁이 끝났다. 앞서 벌어진 술라의 내전, 카이사르의 내전, 리베라토레스의 내전까지 합치면 1세기 동안 지속된 내전기가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끝났고, 팍스 로마나 시대가 시작되었다. 내전을 종식시킨 옥타비아누스는 강대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기원전... |
또한 카이사르 가문의 양자가 되어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후계자로 선정된 후 "카이사르"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이기도 했다. 제정을 확립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후계자도 양자로 카이사르의 이름을 잇게하고 있으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은 모두 카이사르의 가족...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카이사르와의 친분 문단) 몰아넣었다. 기원전 57년 로마로 돌아온 키케로는 폼페이와 카이사르가 주름잡은 정계에서 더이상 주요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기원전 49년 발발한 내전 와중, 키케로는 망설이며 폼페이파에 합류했으나, 결국 카이사르의 권력을 달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으며, 이후로는 안토니우스에... |
안토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구이자 지지자였고, 갈리아 전쟁과 내전 당시 카이사르 휘하에서 복무했다. 카이사르가 정적들을 그리스, 북아프리카, 스페인에서 제거하는 동안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안토니우스는...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브리튼 침공은 갈리아 전쟁 중이던 기원전 55년에서 기원전 54년 사이 카이사르가 브리튼섬을 두 번 침공한 사건이다. 첫 침공에서 카이사르는 두 개의 군단을 직접 지휘하여 켄트 연안을 잠시 점령하였고 두번째 침공에서는 628척의 함선을 동원하여 다섯... |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에서 넘어옴) Thurinus)였으나,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로 불렸다. 기원전 44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외할머니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외종조부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
협력하여 옥타비아누스와 긴장관계에 들어갔고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유일한 적자이자 상속자로 선포하여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자극하였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긴장관계를 넘어 내전으로 돌입했다.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 연합군이... |
고대 로마의 내전은 몇 차례 있었으며, 특히 공화정 말기에 발생했다. 내전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기원전 40년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 원로원의 옵티마테스파의 내전과 그 이후 벌어진 기원전 30년대 카이사르의 후계자들인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
파르살루스 전투 (분류 카이사르의 내전의 전투)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벌어진 카이사르파와 폼페이우스파 간의 전투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의 내전의 일부로 카이사르는 이 전투에서 완벽하게 승리함으로써 내전의 주도권을 잡았고 폼페이우스파는 결국 괴멸하게 되었다. 기원전 48년 7월 6일 카이사르는 3개월에 걸친 디라키움... |
리베라토레스의 내전(Liberators' civil war)은 로마 공화국 말기에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카이사르의 측근들이 그 암살을 보복하기 위해 제2차 삼두정을 조직해 암살음모자들을 토벌한 전쟁이다. "리베라토레스"란 "해방자"라는 뜻으로, 카이사르 암살음모자들이... |
부관이자 그의 손녀사위였다. 술라 사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삼두정치체제를 이끌었으며 한때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었지만 카이사르와의 내전에서 패하고 이집트에서 죽었다. 폼페이우스의 아버지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는 피세노 지방의 부유한... |
유지했다. 기원전 49년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내전이 일어나자 파르케나스는 부왕의 통치 시절의 왕국의 영토 부활을 기치를 삼고 주변국을 침략하였다. 흑해 남해안에서 가장 큰 도시인 시노프를 함락시키고 카파도키아를 침략하였다. 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승리한 직후 부관인... |
로마 최초의 내전에서 승리하다. 기원전 69년 - 신라, 박혁거세 또는 혁거세 거서간 탄생 기원전 60년 - 로마에서 제1차 삼두정치가 시작되다. 기원전 57년 - 신라 건국. 기원전 49년 - 카이사르, 루비콘강을 도하. 기원전 48년 - 카이사르,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내전 문단) 반대했는데 특히 아버지의 죽음에 관여한 폼페이우스를 미워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아버지의 원수이지만 지금은 원로원파를 이끌고 있는 폼페이우스의 편에 가담했다. 카이사르는 정부인 세르빌리아의 부탁을 받고 특별히 전쟁터에서 브루투스를 죽이지 말 것을... |
문다 전투 (분류 카이사르의 내전의 전투) 17일 히스파니아 남부의 문다에서 평원에서 벌어진 카이사르 민중파와 원로원파 간의 전투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의 내전의 마지막 전투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 전투에서 완벽하게 승리함으로써 약 5년간의 내전을 끝내고 로마의 유일한 권력자가 되었다. 탑수스 전투에서... |
소 카토 (내전과 카토의 죽음 문단) 55년 – 법무관직 도전했으나 실패 기원전 54년 – 법무관직 수행 기원전 51년 – 집정관직 도전했으나 실패 기원전 49년 – 카이사르의 내전 발발; 폼페이우스와 함께 그리스로 퇴각 기원전 48년 – 파르살루스 전투, 폼페이우스 패배; 아프리카로 도망함 기원전 46년 –... |
디라키움 공방전 (분류 카이사르의 내전의 전투) 알바니아 두러스)에서 벌어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군대와 폼페이우스군대 사이에 벌어진 3개월에 걸친 전투를 말한다. 카이사르의 내전중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 중의 하나이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이후 발발한 내전에서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에서 폼페이우스파를 분쇄하는... |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내전기간 문단) 일대에서 카이사르의 해군을 괴롭혔는데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방으로 도망치다가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카이사르에게 무조건 항복하였다. 그는 카이사르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하고 카이사르의 군단장이 되어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내전에 참가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