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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丁若鏞, 1762년 ~ 1836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수시(美庸),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문암일인(門巖逸人)... |
단죄되기도 하였다. 노론 중 벽파의 일원인 심환지는 남인 다산 정약용을 미워하면서도, 정약용의 형제들 중 유독 정약용을 특별대우했다. 정약용을 추국하면서 이런 혼우라도 믿을수 있어야지라고 중얼댄 것을 정약용이 여유당전서에 실어놓았다. 심환지왈, 출출(어허, 이런), 혼우라도... |
이승훈 (1756년) (관직출사 문단) 받았다.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한다. 시인으로 이름난 이좌훈(李佐薰)의 6촌 동생이며, 공조판서를 지낸 이가환은 그의 외삼촌이고, 정약용은 그의 처남이다.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후, 전교에 힘쓰며 이벽, 권일신과 함께 '명례방공동체'(신앙모임)를... |
1월 18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인이다. 영조 후반 시대와 정조 시대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최측근 인사 중의 한사람이며, 정약용, 이가환 등의 정치적 후견자였다. 강박과 오광운의 문인이며 사도세자를 가르친 스승이자 세자궁의 측근신하의 한 사람이었다. 본관은 평강... |
탕평책을 펼침으로 인해 남인들에게도 관직출사의 기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윤지충은 벼슬에 뜻을 품고 과거시험에 응하여 1783년(정조 7)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윤지충은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한후 상경하였다. 이때 그의 고종사촌인 정약용을 통해 천주학을 접한 뒤 역관 김범우의... |
국가임을 기록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주장하였다. 그의 연구는 발해사에 대한 초기 연구의 하나이며 그의 역사 인식은 나중에 정약용(丁若鏞), 한치윤(韓致奫) 등의 연구 업적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득공의 가계는 서얼이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
윤선도 (분류 정약용)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이다.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5대조부이다. 정철, 박인로, 송순과 함께 조선 시조시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며, 오우가와 유배지에서 지은 시 어부사시사로... |
사양하고 저술에 힘쓰는 한편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여 안정복, 윤동규, 신후담, 이중환 등을 배출하였고, 그의 학통은 채제공, 정약용, 이가환, 이현일 등으로 이어졌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편찬을 후원하며 자료를 구해주는 등의 도움을 주었다. 남인의 여러 학파들의 마지막... |
자손들이 대소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하여 관직 진출이 금지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이 발표한 폐정개혁안에 사회개혁적인 요구사항으로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할 사”라는 조항이 제시되었다. 정약용은 “남편이 죽으면 같이 따라 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
조선후기 성호학파의 학자, 세례명 암브로시오, 순교한 천주교인이다. 이승훈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1777년 경기도 양주에서 정약용, 이벽 등 남인(南人)의 실학자들과 함께 서양의 학문 및 천주학에 대한 연구회에서 활동하였다. 1801년 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이가환... |
노력하였다. 그의 저작 중 《잡동산이 雜同散異》는 훗날의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저서 중 《임관정요》는 후학인 정약용(丁若鏞)의 저서 《목민심서 (牧民心書)》의 저술에 영향을 주었다. 다음 글로벌 세계대백과. 근대사회의 태동-문화의 새 기운[깨진 링크(과거... |
소수의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고 높이 샀고, 영조 때에 이르러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상은 양득중, 이익, 안정복, 신후담, 정약용 등을 통해 계승되었다. 1673년(현종 15년) 음력 3월 19일 향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스승 중 한사람이자 외조부... |
써도 효과가 없었다. 몇해 뒤에는 오른편 눈의 시력마저 희미해졌다. 또한 시집간 둘째 딸이 그보다 먼저 죽는 일도 겪었다. 그는 관직생활 전후로 서실을 열고 문인들에게 글과 그림을 가르쳤는데, 추사 김정희(金正喜) 역시 그의 문하에서 글과 그림을 배웠다. 1800년(정조... |
조카사위 : 김노경, 문신·추사 김정희의 양아버지 박지원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은신군 김정희 94400 홍대용 (소행성) 혼천의 정약용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실학의 융성〉"... |
숙부: 서책수(徐策修) 숙부: 서채수(徐采修) 양부: 서철수(徐澈修) - 양부이자 숙부 숙부: 서유수(徐柔修) 동시대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법과 제도를 개혁하여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면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를 통해 백성들이 좀 더 잘사는 '풍요로운 나라'를... |
이수광 (관료 생활과 외교, 저술 활동 문단) 그의 사상은 성리학자 겸 실학자였던 또다른 아들 이민구와 허목을 통해 윤휴, 유형원(柳馨遠), 이서우, 이익(李瀷), 채제공, 정약용(丁若鏞) 등에게로 이어졌고 남인 실학자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채신잡록》·《병촉잡기》·《찬록군서》... |
한백겸 (학문 연마와 관직 생활 문단) 학문적 수준에 비추어볼 때 그의 주장은 실로 놀랍도록 참신한 새 학설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주장은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 여러 실학자들의 전제개혁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조부 : 한여필(韓汝弼) 아버지 : 한효윤(韓孝胤) 남동생 :... |
서리 (관리) (분류 조선의 관직과 칭호) 사정에 밝은 서리에게 행정사무를 맡기게 되니, 이들은 지방관을 속이고 사복을 채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식(曹植), 조헌(趙憲), 정약용(丁若鏞) 등 조선 중기 이후의 학자들은 이들 서리의 폐를 열거하고 그 시정책을 촉구하였다. 특히 조식이 “우리나라는 이서(吏胥) 때문에... |
박지원 (1737년) (관직 활동 문단) 글씨체 역시 기존의 서체에 구애받지 않고 글을 지었다. 1791년(정조 15년)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안의 현감으로 내려간 연암 박지원이 부임 첫날 지역 터줏대감들과 술자리에 앉았다. 토호들은 그에게 놀이나 하나 하자며... |
인종 때 동경 개봉부윤으로 재직 중의 판결이 19세기에 석옥곤의 삼협오의 이후 극화되어 알려졌다. 1027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관직은 개봉부윤을 거쳐 추밀원부사에 이르렀으며 사후 예부상서와 이부상서에 추증되고 동해군개국후(東海郡開國侯)에 추봉되었다. 사후 중국 무속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