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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Gaius Cassius Longinus, 기원전 85년 10월 3일 – 기원전 42년 10월 3일)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의 주동자이며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매제였다. 카시우스의 초기 생애는 별로 알려진... |
한국민속촌 개장. 2017년 -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 선수가 은퇴하였다. 기원전 85년 -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인이자 군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기원전 42년) 1804년 - 미국의 외교관 타운젠드 해리스. (~1878년) 1877년 - 한국의 독립운동가 홍진... |
롱기누스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로마의 군인이다. 디오니시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고대 그리스의 문헌학자·수사학자이다. 제목에 "롱기누스" 항목을 포함한 모든 문서 론지노 성창 (롱기누스의 창)... |
Ariminum)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속주 수도는 무티나(현재 모데나)로, 기원전 73년 스파르타쿠스의 군대가 속주 총독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물리친 곳이다. 갈리아 키살피나는 기원전 43년-42년경 옥타비아누스의 정책에 따라 제2차 삼두정치에 의해 이탈리아에 흡수되었고... |
뒤 리베라토레스의 중심인물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로마의 동방 속주들(그리스, 마케도니아, 시리아)과 동방의 동맹왕국들을 장악했다. 한편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의 주요 측근 세 명(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투리누스,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
카시우스(Cassius)는 라틴어 이름이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Gaius Cassius Longinus, 기원전 85 ~ 기원전 42)는 고대 로마의 군인이다. 디오 카시우스(Δίων ὁ Κάσσιος, 160경 ~ 229?)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다. 제목에... |
오로데스에 의해 살해당했고 왕의 아들 파코루스는 기원전 51년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 패하였다. 카이사르의 내전 동안 파르티아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였고 카이사르 사후의 내전에서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40년까지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
(100—101년) 가이우스 미니키우스 푼다누스 (101년과 103년 사이) 카시우스 롱기누스 (109년 이전)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니그리누스 (105년과 110년 사이) 티투스 칼레스트리우스 티로 오르비우스 스페라투스 (111—112년) 카시우스 막시무스 (116—117년)... |
살해당했다. 약 4만명의 파르티아 원정군중 살아서 도망친 로마병사는 약 1만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로마군은 참패했다. 이때,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로마 기병 500기를 이끌고 본국으로 도망쳤다. 전설에 따르면 파르티아 왕은 붙잡혀온 크라수스의 목에 황금을 녹여부었다고... |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넘어옴)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뗏목에 불을 붙인 역청과 황을 실어 여러차례 카이사르군에게 보내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파르살루스 전투 소식에 크게 사기가 올라간 카이사르군을 공격하자 이에 격분한 카이사르 고참병은 카시우스의 배를 나포하고 그들을 내쫓았다. 카시우스 휘하... |
가이우스는 다음을 가리킨다. 가이우스 (법률가) (Gaius): 로마의 법학자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Gaius Cassius Longinus):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인이자 군인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Gaius Fabricius Luscinus): 고대... |
전투가 벌어졌고 노예군이 집정관의 군대를 다시 한번 격파한 후 북쪽으로 계속 향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플루타르코스는 갈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내려와 스파르타쿠스를 저지하려 했으나 역시 패배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스파르타쿠스가 북쪽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다시... |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에서 넘어옴) 재산을 몰수하고 만약 그들이 국외 탈출을 기도하면 그들을 잡아 처형하였다. 세 집정관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자인 마르쿠스 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곧 싸우기 위해 자신들의 병사들의 월급을 올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은 이에 크게 자극받아 이 법안을 만들었다. 3명의 집정관이... |
카이사르와 합류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자 수석 부사령관 도미티우스에게 2개 군단과 기병 500기를 주어 마케도니아로 보내고,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는 1개 군단과 기병 200기를 주어 테살리아로, 사비누스에게는 5개 대대와 소수 기병을 주어 아이톨리아로 보냈다. 4월... |
이븐 샤하드 가르니에 드 나블루스 이븐 주바이르 마이스터 지브란트 로베르 드 사브레 라시드 앗딘 시난 몬페라토 후작 구글리에모 5세 알렉산드로스 3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클레오파트라 7세 나자렛의 예수 칼리굴라... |
사람들가운데는 기원전 71년의 집정관을 지냈으나 방탕한 생활로 원로원에서 쫓겨났다 돌아온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전직법무관 카시우스 롱기누스등 원로원에 불만이 많았던 귀족들과 빚이 많은 자들이었다. 당시 집정관인 키케로는 정보망을 통해 이 음모를 알고 있었으나 확실한... |
그는 카시아 레피다 [80년경 출생), 카시우스 레피두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유니아 레피다의 아들)의 딸]과 혼인했다. 아버지와 조모를 통해서, 카시아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직계 후손이었다. 베레니키아누스와 카시아는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헬리오도루스 (서기 100년경... |
비롯한 폼페이우스의 대부분의 장군들은 도망치는 데 성공했고 키케로와 카토는 디라키움에 남아있었다. 반면 마르쿠스 브루투스나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은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에 카이사르에게 항복했고 그들은 훗날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가 되었다. 한편 폼페이우스의 근거지였던... |
공화국이였지만, 루시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그의 아들간의 분쟁(기원전 88년–8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분쟁(기원전 49년–45년),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의 분쟁(기원전... |
증명하게 된다. 크라수스 휘하의 카시우스는 시리아에서 약 10,000명의 병사를 데리고 돌아와 2년간 시리아를 오로데스 2세의 공격으로부터 지켰다. 그 후 카시우스는 파르티아군을 격파하고, 이 승리로 인해 키케로에게 극찬을 받게 되었다. 카시우스는 기원전 44년 카이사르 암살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