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석(吳泰錫, 1940년 10월 11일 ~ 2022년 11월 28일)은 대한민국의 극작가·연출가이다.
1940년 충남 서천군 서천면 선암리에서 태어나 1964년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단막극 《웨딩드레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장하였다. 전쟁의 트라우마 ‘전통의 현대화’의 대가 오 연출은 잃어버린 우리 것을 공연무대를 통해 되살리는 일에 매진해 왔다. 일제강점기, 해방 후 정부수립과 함께 바로 이어진 6ㆍ25전쟁, 산업화와 급속한 경제발전 등으로 지난 100여 년간 우리 문화는 단절돼 왔다. 이를 복원하는 일은 전쟁 이전 세대에게는 일종의 부채의식이자 한(限)의 존재이다.
어린 시절 서울 한복판에서 겪은 참상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국내 2기 변호사로, 경무대(청와대 옛 명칭) 법무관이었다. 6ㆍ25가 터졌지만 어머니가 해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3남 1녀인 형제자매와 할머니까지 일가족은 피란을 가지 못했다. 한 달 지난 7월 중순에는 남대문 5가에 있던 집으로 인민군이 들이닥쳐 총구를 들이대고 아버지를 끌고 갔다.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장남인 오 연출은 당시 나이 10살이었다. 갓난아이까지 4남매만 남기고 하루 아침에 아버지와 생이별한 어머니의 나이가 겨우 30을 갓 넘을 때였다. 전쟁으로 인해 한 가족극이 희극에서 비극으로 예고 없이 전환된 것이다. 어머니는 통일과 가족상봉의 염원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5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종손인 그만 할머니를 따라 본향인 아룽구지(충남 서천군 한산면)로 피란을 떠났다. 50일을 걸어서 무전취식하며 당도한 집성촌에서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3년을 보냈다. 시골에서 보낸 3년은 치유의 시간이었다. 그는 “전쟁이란 걸로 인해 세상이 바뀌는 걸 봤지만, 거머리 떼고 메뚜기 잡으면서 자연이란 더 큰 것을 경험했다”고 떠올렸다.
그의 작품 전반에 등장하는 세시풍속을 체화한 시기이기도 하다. 굿, 산대놀이, 판소리, 무가, 설화 등에 대한 원초적인 관심이 할머니와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DNA에 뿌리내린 시기다.
당시 읍내 등기소에서 유지 120여명을 한꺼번에 불태워 죽인 실제 사건, 읍내 저잣거리에서 장정들이 죽창을 들고 돌아다니던 풍경 등 10대 초반의 기억은 훗날 ‘자전거’(1983년)의 모티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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